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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3-31 00:00
고향의 천주교 역사
 글쓴이 : 오스테파노
조회 : 5,849  
죄송합니다.
고향있어도 가보시지 못하시는분들이 계신데,
이런 글을 올려서 무척 죄스럽습니다.
저의 고향은 충남 예산입니다.
예산성당이 무척 오래 됐다는것만  기억을하다가 ,최근 자료를 찾게 되어 올려봅니다
예산에 있는 간양공소가 1801년에 세워졌다니(집이랄것도 없겠지만)
당시 선조들께서 엄청 고난을 겪으셨겠지만, 지금의 저는 가슴이 뿌듯합니다.
우리 성당도 200년후에 더 멋있는 역사가 이루워 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예산지방의 천주교

예산지방은 이익의 후손인 여주 이씨 일가의 실학자들 중에서 천주교를 수용한 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들의 사우(師友) 및 문인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대표적으로 이가환은 서양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외숙이 되고, 이벽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부친 이용휴(李用休)의 제자 권철신과 함께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순교(殉敎)하였다. 이밖에 이승훈이 정조 15년(1795) 예산에 유배되었던 연고와,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충청남도 일대에서 포교활동을 벌여 예산지방에서는 다수의 천주교 신자가 나타났다.
순조 1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 당시에는 덕산 출생의 황필(黃泌)이 희생되었고, 예산군민 광옥이 체포되었다. 황필은 덕산 출신으로 서학에 심취하여 서양인에게 세례를 받고,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위하여 활동하였고, 광옥은 제사라는 것은 일체 무익하다고 하고 천주교를 전도하였던 인물이었다. 또 이전 정조 22·23년(1798·1799) 호서일대(湖西一帶)의 박해 당시에 이지현(李止玄)이 순교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신유사옥과 관련하여 처단된 일반 신자들이 상당수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천여명의 신자들이 각지에 흩어져 교회재건운동(敎會再建運動)을 도모하였다. 이에 순조 11년(1811) 또다시 전국의 천주교 신자가 잡혔는데, 이때 덕산·해미·홍주 등지에서 14명의 교인이 잡히는 등 우리고장에서도 끊임없이 천주교인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한편, 내포지역에 정조 8년(1784)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고 각처에 교우촌(敎友村)이 생겨나면서 충남지역에 활발히 전파되어 많은 천주교 신자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예산지방에는 고종 14년(1877) 9월 입국한 두세(Doucet, 정가이 丁加彌)신부가 고종 20년~21년(1883~1884), 천안·아산·당진·서산·공주·부여·논산·서천 등지를 방문할 때 예산읍 간양골(현재의 예산읍 간량리)과 양촌(현재의 고덕면 상궁리)을 방문하여 이곳을 공소(公所)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우리 고장에서는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다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될 수 있었다.

성당사진
1,<img src="http://santafelove.org/zb41/data/photo/1019705641.jpg">
2,<img src="http://santafelove.org/zb41/data/photo/1019705889.jpg">
3,<img src="http://santafelove.org/zb41/data/photo/101970614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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