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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10-20 00:00
성녀 마더 데레사
 글쓴이 : 솔내음
조회 : 8,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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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center><FONT color=#0066ff size=3>가톨릭신문사 발췌. 기사입력일:
2003-10-19<B><FONT face=굴림체><BR><BR><FONT color=#666666>"데레사 수녀 시복 특집 "가난한 이들의
성녀, 어머니 데레사"</FONT></FONT></B></FONT> <BR></DIV>
<P style="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BR><BR><BR>
<TABLE cellSpacing=6 cellPadding=0 width=250 align=left border=0><BR>
  <TBODY>
  <TR><BR>
    <TD><FONT size=2><IMG
      src="http://www.catholictimes.org/file/BBS-17/upload/23690801-1.jpg"
      border=1></FONT></TD><BR></TR><BR></TBODY></TABLE><BR><FONT size=2>“죽어가는 이들 돌보는
것은 나의 소명” <BR><BR>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어머니가 되어주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 작달막한 키에 파란 줄이
들어있는 꼬깃꼬깃한 무명천의 <BR>흰색 사리식 수도복을 입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를 일러 사람들은 「마더」, 「어머니」라 부른다.
<BR><BR>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월 19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마더 데레사의 시복식을 거행한다. 시복식을 맞아 그의 생애와 가난한
사람들에 <BR>대한 깊은 사랑을 되새겨본다. <BR><BR>지난해 12월 10일 교황청은 마더 데레사와 관련된 기적을 인정하면서 세상을 떠난지
불과 5년 3개월만에 그를 복자로 선포한다는 <BR>결정을 내렸다. <BR><BR>데레사 수녀의 시복 청원인인 사랑의 선교 수사회 브라이언
콜로디예추크 신부는 『시복식이 이렇게 빨리 이뤄진 것은 이미 데레사 수녀가 <BR>생전에 보여주었던 거룩한 헌신과 높은 명성 때문』이라며 『이미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 심지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BR>그를 「살아 있는 성녀」로 불렀다』고 말했다.
<BR><BR>“가난한 사람들처럼 <BR><BR>그냥 죽어가게 해주십시오” <BR><BR>1996년 11월 23일 캘커타의 성녀 「어머니」
데레사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부리나케 병원에 입원했다. 데레사 수녀는 의사들의 치료를 <BR>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구경도 못하고 죽어가는데 왜 나는 이렇게 극진한 간호를 받아야 하는가』라며 안락한 <BR>병원 침대 위의 자신을 자책했다. 죽음 앞에서
「가난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었던 것이다. <BR><BR>그녀는 평생 동안 「가난」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부도 피해야 한다는 <BR>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으면 베풀 것이 적다』고 확신했고 물질적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 모두가 <BR>함께 가난을 나눌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BR><BR>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자마자
상금으로 받은 19만 달러는 즉시 나환자 수용소 건설 자금으로 쓰여졌고 축하연도 취소했다. 64년 <BR>교황 바오로 6세가 캘커타를 방문한 뒤
선사한 흰색 리무진도 즉시 팔아 서벵골의 나환자 수용소 건립에 사용했다. <BR><BR>한국을 세 차례 방문한 마더 데레사는 81년 한국을 첫
방문했을 때에도 비행기를 내려섰을 때 허름한 수도복에 성경책, 묵주, 그리고 <BR>잿빛의 헝겊 가방만이 굵게 마디진 손에 들려 있었다.
<BR><BR>담 너머 가난을 외면할 수 없다 <BR><BR>데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Skopje)에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본명은 아녜스 곤히아 <BR>브약스히야(Agnes Gouxha Bejaxhiu). 18살 때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에 들어가 이듬해 캘커타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 <BR>가서 20여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BR><BR>하지만 그는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수백만명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담 너머의 가난을 더 <BR>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캘커타의 빈민촌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1948년 『부유한 이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가난한 <BR>사람,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며 학교를 떠났다. <BR><BR>그리고 50년 단돈 45루피로 시작된 「사랑의 선교회」는 이제 「사랑의 선교
수사회」(1963)와 「협력자회」(1969), 「사랑의 <BR>선교 관상 수녀회」(1976), 「사랑의 선교 관상 수사회」(1979), 「사랑의
선교 사제회」(1984) 등으로 식구가 늘어나 <BR>전세계에서 오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BR><BR>하느님의 작은 몽당 연필
<BR><BR>82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데레사 수녀는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랑만이 최고의 선(善)이며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BR>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은 가난도, 고통도, 불행도, 절망 조차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꿔주는 유일한 대답이다. <BR><BR>가난의
선택도 바로 그 사랑의 당연한 귀결이다. 데레사 수녀는 74년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BR>본다』며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분을 돌봐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고 말했다. 캘커타에서는 사람들이 <BR>그녀를 그저
「마더」, 「어머니」라고만 부른다. 그가 자신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주었고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BR><BR>마더 데레사를 영성이나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지극히 <BR>단순하고 분명한, 그리고 가난한
삶 속에서 우리는 그의 거룩함을 느끼고 볼 수 있을 뿐이다. <BR><BR>지난 95년 출간된 마더 데레사 일일 묵상집에는 이런 글이 들어있다.
『나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작은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BR>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그는 또
자신을 낡은 전깃줄에 비유해 『나는 가늘고 낡아빠진 <BR>전깃줄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전기이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BR><BR>사랑의
혁명 <BR><BR>쾌락과 성공, 물질적 풍요와 이기심이 지고의 가치인 현대인들에게 온전한 자기 포기와 헌신의 삶을 살았던 마더 데레사는 왜
그렇게 <BR>매력적인가? <BR><BR>콜로디예추크 신부는 그 이유를 데레사 수녀가 『극단적으로 복음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데레사 수녀의 말 한마디 <BR>한마디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가르친대로 사랑으로써 그 말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BR><BR>그녀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대포나 폭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랑을 <BR>나누는 일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사랑의 혁명」이라 부를 만하다. <BR><BR><BR><BR>마더 데레사의
말들... <BR><BR><BR><BR>▲ 현대의 가장 큰 적은 사랑의 빈곤입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비우는 가난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정신입니다(1982년 5월, <BR>가톨릭신문과 인터뷰에서). <BR><BR>▲ 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은 것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 <BR><BR>▲ 만일 불친절로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지나친 친절이 실수가 된다고
합시다. 나는 비록 실수가 될지언정 지나친 친절을 택하겠습니다. <BR><BR><BR>▲ 어떤 상류층의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로
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혁명입니다. 사랑의 <BR>혁명입니다. <BR><BR>▲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면 희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BR><BR>▲ 어떤 사람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나환자를
만지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2백만 <BR>달러를 준다고 해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꺼이 할 수 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BR><BR>▲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도 생명은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이들의 비명이 하느님의 귀에까지 들렸다고 <BR>확신합니다. <BR><BR>▲ 『어린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돌보겠습니다. 캘커타에서는 이런 농담이 유행입니다』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자연피임을 강조하시는데도 <BR>그 주위에는 점점 어린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BR><BR>▲ 애착 때문에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한번 살펴보세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적게
가질수록 <BR>좋지요. <BR><BR>▲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데, 불행하게도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유행하지 않습니다. <BR><BR><BR>▲ 거룩함은 선택된 소수만의 사치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BR><BR>▲ 가난한 사람들은 경이롭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존엄성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BR>많은 것을 줍니다. 우리가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줍니다. <BR><BR>▲ 기도를 하기 위해서 일을 중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되지요. <BR><BR>▲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BR><BR>▲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못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가 <BR>많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BR><BR><BR><BR><BR><BR>사진말 <BR><BR>데레사 수녀가 1940년경 로레토 수도회에서 찍은 사진. 데레사 수녀는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할 때까지 로레토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BR>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인도 캘커타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마더 데레사.
198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 평화를 <BR>위한 기도 모임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고 있다.
<BR><BR></FONT><BR></P>
<P></P>
<P style="MARGIN-TOP: 0px; MARGIN-BOTTOM: 0px"><BR><SPAN class=article><FONT
size=2><박영호 기자> <FONT class=mail color=#336699><A
href="mailto:young@catholictimes.org">young@catholictimes.org</A></FONT>
<BR></FONT></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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