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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4-02 22:25
 조회 : 7,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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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_본질.hwp (48.0K) [100] DATE : 2008-04-02 22:25:25 |
죄의 본질
- 기초윤리신학: F 뵈클레 신부 著(독일 본 대학 윤리신학 교수) ‘중에서 발췌’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은혜로이 제공하시는데 그것을 거절함도 죄가 된다. 바로 여기에 죄의 본질이 있다.” (내용 중에서)
1. 성서의 사상
성서에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가는 역사이며, 은총을 힘입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역사인 것이다. 또한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들의 역사 ‘한가운데서’ 당신의 구세사(救世史)를 전개하고 계심을 증언하고 있다. 성서에서 죄의 가장 깊은 본질이 ‘하느님께 대한 배역(背逆)’이라는 데에는 전혀 이의가 없다. 죄는 ‘하느님의 뜻을 위반(違反)’하고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다. 죄는 항상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이 하느님을 저버리며, 그래서 하느님이 또한 인간을 저버리시는 것이다.
2. 구약성서
창세기 첫 장들(3-11장)에서부터 이미 죄가 무엇인가 하는 전형들이 제시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과 가졌던 원초적인 관계가 극적인 상황 속에서 파기(破棄)되어 가는 태고사인 것이다. 특히 인간 원조(元祖)의 타죄(墮罪)에서 그 사실이 전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범죄는 외면상으로는 하느님의 계명의 위반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윤리적 자율(倫理的 自律)을 문제삼고 있다. ‘선과 악을 알아 하느님과 같이된다’는 사실이 하나의 유혹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원조가 만사를 다 알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알고 싶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차라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자기가 스스로 정(定)하고 거기에 따라서 살고자 했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는 결국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용납될 수 없는 자기주장(自己主張)을 하였다는 것이요,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향유하시는 최상권(最上權)에 반역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순진한 순종(順從)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도전한다. 죄의 신학적 본질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할 수 있다: 죄는 야훼께 대한 반역이요(민수 14,9; 신명 28,15-44; 1사무 12,14), 하느님께 대한 불경이며(2사무 12,10; 이사 1,4; 43,24), 하느님께 대한 불충(不忠) 또는 부정(不貞)이다(이사 24,5; 48,8; 헤스 16,59; 호세 3,1), 성서가 가리키는 죄의 근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고 사악한 지향과 마음에 있다(창세 6,5; 8,27; 예례 17,9; 시편 51,12), 따라서 죄는 개인적 결단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악한 충동(창세 8,21)이나 악마(지서 2,24)는 죄의 원인이 아니라 죄에로의 유인(誘引)일 따름이다.
3. 신약성서
구약성서에서부터 죄의 개념은 구세사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죄는 이스라엘이 계약의 하느님께 범하는 부정(不貞)이자 반역(反逆)이라는 것이다. 벌써 구약성서부터 인간이 죄악을 극복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고, 하느님이 개입하셔야만 한다고 했다.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깨끗하게 씻으시고’, ‘소생시키시고’, 새로이 창조하실 것이다(시편 51편). 이상의 사상이 신약성서에 그대로 나타나 있고 거기서 한걸음 더 진보하고 있다. 신약성서가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는가를 알려면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육화(肉化)에 비추어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1) 구속자(救贖者)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들에게 알려주려고”(루가 1,77)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없애버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다. 그분은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마태 9,13; 18,11),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피를 흘리셨다(마태 26,28). 그래서 그리스도는 죄를 용서할 천부(天賦)의 권한을 갖고 계시며(루가 4,18; 마태 9,6; 마르 2,9), “죄 사함을 받기위한”(사도 2,38) 세례를 제정하셨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부여하셨다(요한 20,23). 이리하여 인간을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봉사(奉仕)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제하시고, 전 인류를 지배하고 있던 사탄의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서 그 절정에 달한다(로마 1,18; 3,30).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모든 사람을 불순종(不順從)에 붙이셨다. 죄는 권세를 쥔 존재로 인격화 되어있다: 죄는 아담의 죄로 이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인간을 죽음에 넘겨주는 왕자(王者)이다(로마 5,12; 6,23).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죄많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하시고 죄를 대신하게 하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육체(인간) 안에 있는 죄를 단죄(斷罪)하신 것입니다”(로마 8,3).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은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罪)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의(義)가 되었던 것입니다”(2코린 5,21). 십자가에서, 주님의 부활에서 죄와 죽음은 제압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신 구원계획이다.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으로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 하신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는 것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22).
2) ‘죄’와 ‘죄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들은 복수명사 ‘죄들’을 주로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글자 그대로의 일반적 의미로 죄를 알아듣는 것이다. 즉 공관복음이 말하는 죄는 하느님의 계명(誡命)에 대한 위반, 또는 해당된 금령(禁令)에 대한 고의적인 무시이며, 따라서 하느님께 배역(背逆)되는 무엇을 의도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죄의 고백이라든가 용서(마태 3,6; 마르 1,5; 3,28; 11,25;, 루가 11,4 등)를 운운할 때, 또는 그저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이러한 일반적인 죄의 개념이 배후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난 예수가 당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법률적이고 외면적인 죄의 개념에서 그들을 탈피시키려고 노력한 사실도 공관복음서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는 윤리생활(倫理生活)이 인간의 심중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당신 백성을 구원하려고 세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찬 구원계획을 그들에게 밝히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하느님이 파견하신 당신의 사자(使者)를 거부하고 자신을 폐쇄한다면 이는 화근(禍根)이라고 단언하였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불신(不信)
으로 막는다면 이는 하느님의 영(靈)을 막는 소행이며 따라서 자기의 구원을 파괴하는 것이다(마르 3,18 이하; 루가 10,13 이하). 벌써 그때부터 예수의 설교 속에는, 단지 죄가 윤리적 개념만을 갖는다는 당대의 상식을 벗어나서, 불신앙(不信仰)도 실제적 죄로 나타났다.
요한과 바울로는 죄와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을 긴밀하게 결부시켜서 본다. 이는 필시 심원한 신학적 사색에서 얻은 결과일 것이다. 특히 의미심장한 일은 그들은(복수명사로) ‘죄들’을 말하는 일이 없이 그저 단수로 ‘죄’만을 이야기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개개의 범죄행위 이면에 ‘악의 상황’ 인류 전체와 인간 개개인을 죄로 충동하고 몰고 가는 ‘실추(失墜)된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힘만으로는 그 처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 바오로는 유대인건 이방인 이건 간에 모든 인간이 범하는 개개의 죄악의 행위들이 난무하는 어두운 정경을 바라보면서 결국 모든 인간이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한 사람이 범죄하여 죄가 이 우주에 들어와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과, 죄가 들어오면서 죽음을 가져왔고, 이 죽음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권세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로마 5,12).
인간은 누군가의 힘을 입어서 구속(救贖)되기까지는, 아무런 희망도 못가진 채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로마 8,2). 그래서 인간은 글자 그대로 “죄의 종으로 팔린” 몸(로마 8,2)이다. 죄의 세력권은 “전체적이다. 우리의 내부를 장악하고 있다. 죄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심부(心部)를 지배하고 있다. 죄는 인간 속에 ‘깃들여 있으며’(로마 7,17) 거기서부터 인간의 행동을 조종한다.
- 인간은 자기의 결단(決斷)을 내리는 주인이며 따라서 그 결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거기에 대하여 셈을 바쳐야 한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 개개인이 범하는 범죄행위들과 전체 인간이 범하는 행업들은 죄악의 신비로운 연대성(連帶性)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연대성의 개념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구속행위가 우리에게까지 효험을 미칠 수 있다는 논거가 되기도 한다.
- 요한에게서도 이 깊은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요한 역시 인간이 범하는 개개의 범죄행위 배후에는 하느님께 반항하면서 인간을 노예로 사로잡는 신비로운 세력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죄없으신 하느님의 아들만이 그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한다(요한 8,46;
1요한 3,5). 역사의 도정을 밟아오면서 타락한 이 세상은 광명이신 그리스도와 대치(對峙)하고 있다. 이 세상은 빛을 싫어한다. 하느님의 사자(使者)인 메시아를 거부함으로써 죄는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하느님이 당신의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 보이신 계시를 인간이 맹목적으로 또 증오심을 갖고 배척함으로써 본성과 세력이 어떤 것인가 드러났다(요한 3,19 이하; 9,40; 12,37 이하; 15,22-25). 이러한 거부와 배척의 배후에는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한 3,38-44; 1요한 3,8이하)인 악마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불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원천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죄가 된다(요한 8,21.40). 성령께서 세상을 죄있다고 지적하시는 것도 이 불신앙 때문인 것이다(요한 16,9).누구든지 범죄하는 자는 자기가 이 세상과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자기가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과 원수되어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세상의 이 죄를 하느님의 어린양이 지고서 속죄하였다.
- 그러므로 신양성서는 죄의 개념을 이중(二重)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서는 죄가 하느님께 대한 배역이요.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만드는 사악한 세력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도 본의미로 이야기하는 ‘죄’가 ‘죄들‘, 즉 범죄행위들을 통해서 자기를 현시(顯示)하고 또 자기를 증식(增殖)시킴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 신학적 고찰
인간의 죄란 많은 인자(因子)를 포함하는 신비스러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히 “죄악의 신비”라고 형용할 수 있겠다. 죄란 언제나 인간이 하느님의 요구에 반(反)하여 내리는 자유로운 근본 결단이다. 피조물이 자기 창조주의 뜻을 이탈하여, 구속자의 사랑을 등지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행위(行爲)로서의 죄’, 세력으로서의 죄‘ , 표상으로서의 죄’로 단계적으로 통찰하며 그 신비를 더듬어 본다.
1, 행위로서의 죄
죄란 ‘인간의 자유로운 근본 결단’이라고 이미 말했다. 결국 인간은 환경이라든가 육신이라든가 본성에 탓을 돌려 자기 유죄(有罪)를 변명할 수는 없다. 인간은 ‘죄의 원인’을 자기자신 속에서, 자기의 자유의지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 죄의 근원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향유하는 자유의지의 고유한 성격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존재가 한정되고 유한 하므로 필연적으로 ’초월적 원리‘와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절대존재(絶對存在), 다시 말해 순수진(純粹眞 )과 순수선(純粹善)에서 자아실현(自我實現)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순수진 및 순수선과 합일되고 싶어 한다.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그리고 철저하게 행복을, 자기실현을 그러니까 사실상 “선(善)’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과연 인간의 모든 노력의 근저에는 이 선에의 욕구가 갈려 있고 선에 의해서 끌리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악(惡)을 원하는 것도 그것이 선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계시는 소수의 선택된 인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경우로 미루어 본다면, 하느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당신을 항상 개방하고 계시며, 연약한 피조물들이 제기하는 의문(疑問)들에 대한 해답으로서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다. 문제는 영신적인 인격체의 심부(心部)에다가 내밀한 은총으로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이다. 그 계시를 기반으로 하여 하느님은 신앙을 힘입어 사리를 올바로 판단할 능력을 인간에게 주신다. 그런 면에서 계시와 신앙은 항상 있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는 당초부터 구원(救援)의 역사였다. 죄는 단순히 인간실존의 절박한 문제를 외면하고 인간이 자신을 폐쇄(閉鎖)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은혜로이 제공하시는데 그것을 거절함도 죄가 된다. 바로 여기에 죄의 본질이 있다.
“죄는 영신적 인격체의 심부에서 하느님이 친히 건네오시는 말씀을 외면하는 현행적이고 인격적인 거절이다. 따라서 죄의 근저에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기자신에게로 지향(指向)하는 불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진정한 자아실현(自我實現)을 거부하고 자기자신에게서 그것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로와 요한이 hamartia('죄의 단수형)라고 부른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가면서 결단하는 근본 선택을 hamartia라 한다.
2. 세력(勢力)으로서의 죄
구약의 예언자들이 계약의 백성의 죄악을 질책할 때에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길을 벗어나 비뚤어졌으며 불충(不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계약을 파기했으며 낯선 신(神)을 따라갔습니다.” 예수의 비유도 이와 비슷하다: 집을 나간 아들, 주인 것을 가로채려는 포도밭 소작인들, 길 잃은 양 등. 성서가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는 단지 인간의 자아실현의 미달(未達)이 아니다. 하느님이 뜻하신 진정하고 본래적인 것의 왜곡(歪曲)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가 먼저 이루어졌고, 이 창조계의 반항(反抗)이 그 다음에 뒤따랐던 것이다. 이러한 배역의 결과로 인간은 죄인이 되었으며,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 하느님의 진노를 산 인간(에폐 2,3)이 되었다. 이것은 단죄 받은 상태이며, 성서는 모든 인간이 이 상태에 놓여 있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로마 3,10).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이 마땅히 인정(認定)해야 할 하느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자기의 잘못으로 죄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안는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반(離反)은 이보다 훨씬 파멸적인 세력을 갖고 있다.
죄가 각 개인에게서 그 이상의 다른 죄들을 범하게 하는 조건을 조성하듯이, 죄가 인류역사에 있어서는 하나의 환경을 만들며 그 속에서는 죄가 더욱 넓게 범람하기만 한다. 이런 상태는 - 죄를 이 세상에 가져온 -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로마 5,12)를 포함해서 인간들이 범한 모든 죄를 총합(總合)한 결과이다. 이것이 곧 구속(救贖)받지 못한 상태, 은총이 없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 빠져 있는 한, 인간은 자기가 실제로 죄를 범하기 전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능력이 없다. 원죄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이러한 기정사실(旣定事實)을 원인론적(原因論的)으로 규명해 보고자하는 신학적 시도일 따름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하고 참다운 존재가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잃는다면 바로 자기 존재의 고유한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을 이탈하여 자기자신을 향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된다. 초대교회는 이 진리를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다. 제2차 오랑쥬 공의회의 규례 제 22조는 “자비로운 은총(가장 넓은 의미에서)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죄다”고 선언하였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실존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구세주의 덕분이다. 그리스도는 만유가 당신을 통해서, 당신을 위해서 창조된 분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파괴적 행실을 중지 시켰고, 이제는 당신의 구속에 입각하여 인간을 배려하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이 실제로 생존하는 만큼 자신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갖춘 인간도 은총을 갖추지 못했다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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