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림터 > 자료실
|
 |
작성일 : 08-02-05 18:59
 조회 : 8,159
|
사도신경 입문(入門)
1. 왜, 어떻게 사도신경인가
왜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곧 신앙고백문(credo)을 새삼 들추고자 하는가?
혁신적인 과학이론과 첨단 문명의 시대에 신앙을 이치에 맞게 설명해줄 방도는 달리 없는가?
이런 물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도신경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한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단어와 문장들의 의미는 결코 과학의 발달로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개념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다 담겨있습니다. 사도신경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진리를 모두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한 단어, 한 문장씩 오늘에 맞게 풀이해 갈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어제
1)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사도신경은 이단과 사상적 오류의 위험들에 직면한 초기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서 수세기 동안의 형성과정을 거쳐 생겨났습니다.
우선, 그 출발은 복음과 사도행전을 근간으로 한 원시적인 형태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마태 16,16)과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고백(마태 28,19 외 다수)이었습니다. 성서 원문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16),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는 믿습니다”(사도 ),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마태 28,19)라는 대목 등을 변형하여 신앙고백의 틀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세례 때 ‘세례 문답’ 형식으로 사용되었고, 미사 때 말씀의 전례 때에 감사의 기도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다가 3세기 말경 로마에서 8-9개의 신조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 신경’으로 발전하고 이것이 사도신경의 모체인 동시에 후기에 나타나는 모든 신경의 원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다음으로, ‘사도신경’이라는 표현은 이 신경이 12사도에 의하여 공동으로 작성되었다는 전설이 퍼져 있던 4세기 말경에 나타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비로소 신앙고백문 형식으로 확정되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침내, 6세기경 사도신경은 12사도의 숫자와 일치하는 12개 항목으로 완성되기에 이르고 7세기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표준문이 작성되어 로마를 제외한 다른 서방교회에서 예비자 교리 지침서로 사용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 의해 비로소 서방교회의 공식신경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이후 현재까지도 사도신경은 모든 서방 교회에서 세례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주일 미사 때마다 신자들은 이 신경을 외움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어떻게 전수되었는가
초세기 수 백 년 간 신앙고백문이 아무에게나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종이에 기록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D. Emeis, Kleiner Katechismus 참조).
첫째, 신앙고백문을 진지하게 신앙공동체에 속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전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소중하고 귀한 말씀이 남용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미연에 막았습니다.
둘째, 믿음은 ‘문자’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 곧 그리스도인과 그 공동체의 ‘삶’으로써 전파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셋째, 신앙고백의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에 새기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신앙고백문을 골수에 박히도록 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 고백문을 늘 반복해서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자신들이 과연 믿음 안에서 누구에게 속한 존재들인지 상기해야 했습니다.
사도신경의 오늘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정신을 어떻게 살려내야 하겠습니까?
첫째, 신앙고백은 ‘문자’나 ‘입술’로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유대한 ‘삶’으로써 전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종이에 적혀 있는 문장들이 신앙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문자가 믿음을 전해주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기록된 문자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신앙고백, 또는 신앙고백에 대한 설명을 글로 읽어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와 아쉬움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객관적인 진술이 아니라 ‘나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고백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계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외아들이다...”는 식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는 ...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나는 ... 믿나이다”입니다. 내가 믿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즉, 공동체에 전수된 그 교회의 신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고 실행하는 행위의 주체는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신앙고백은 가슴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나는 ...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합니다. 내 희망을 ...에게 겁니다. 나는 ...에게 속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마음을 다하여 ...을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넷째, 신앙고백문의 “전능하신 천주성부”부터 “아멘”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통째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대목만 강조해서도 안되고 마음에 안드는 부분을 삭제해서도 안됩니다.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앞부분의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고백도 뒷부분의 내용들은 온전히 이해하고 고백할 때 비로소 본래 개념의 깊이와 넓이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 신앙의 본래적인 원천은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고백문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2. Credo in Deum(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
Credo in Deum(나는 하느님을 믿나이다). 사도신경의 첫 문장입니다. 첫 고백입니다. 가슴떨리는 고백입니다. 욥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절절하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욥기 19,25)
인기 없는 하느님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슬프게도 이 고백을 맥없이 합니다. 아무런 감흥 없이 합니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혀 매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아주 드믈게 합니다. 다른 물음들이 그들에게는 훨씬 중요하고 긴급합니다.
예컨대, 직장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일자리가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을 통해 생계유지가 가능해지고, 일류백화점에서 고급상품들을 살 수 있고, 여가를 멋있게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보다 중요합니다.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 가족간의 따뜻한 정, 친구들과의 우정이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정치문제가 더 비중 있는 관심거리입니다. 국가안보, 입시제도, 환경문제 등에 대한 정책이 자신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얼핏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느님과 전혀 무관한 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문제들을 하느님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상의 대화 중에 전혀 언급하지 않는 물음과 목마름이 나에게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하루 하루 그리고 한해 한해 그저 조금 더 행복하게 또는 조금 덜 행복하게 생존한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으로는 나의 마음에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의 삶과 행복을 하느님께 의탁해 봅니다. 그 결과 나는 하느님 없이는 여태까지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힘과 희망을 얻게 됩니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그전에 누리지 못하던 빛과 색깔을 얻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사도 17,28). 하느님께서는 사실 내 안에서 그 어떤 것에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해갈되지 않는 나의 목마름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먼저 나 자신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오늘날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에 정의와 평화, 선과 사랑, 생명과 기쁨이 없다고 투정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결핍을 느끼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부인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안기지 않는 것, 그를 잊는 것, 그분 없이 스스로 일을 도모하려는 것, 그분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을 믿지는 못합니다.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의탁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단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몇몇 문장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하느님이 나에게 전적으로 중요한 분, 아니 절대적인 분, 내 생각의 첫 자리, 내 시간의 첫 자리, 내 사랑의 첫자리를 차지하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로,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나 자신을 그분의 베푸시며 도우시는 손길에 의탁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고통, 두려움과 희망 속에 있을 때 감사하고 부르짖고 청하기 위해 그분께 나아가겠다는 고백이며,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수용할 수 없을 때에도 그분께 나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셋째로, 많은 이유와 유혹들이 훼방하더라도 오로지 그분 앞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는다 함은 신뢰하는 대상에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의의 명제들이나 신앙조목들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그분께로부터 나오고 또 그분께로 향함을 확신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신앙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뉴만 추기경이 말했듯이 믿음은 우리가 온몸으로 하는 ‘실재동의’이지 머리로만 하는 ‘개념동의’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되
하느님을 믿되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첫째, 진실되고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우리의 “하느님”으로 여기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1) 우리가 소유하고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2) 승진이 하느님 노릇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위로’ 오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심지어는 사람들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3) 사람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안전과 온전한 위로를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욕구를 엉뚱한 데서 충족하려 하기 때문에 사물, 우리의 캐리어, 우리의 모든 가능성,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사랑에까지 의탁하며 무리하게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둘째, 우리는 잘못된 하느님 상(像)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고 전쟁을 이끄는 것보다 차라리 어떤 하느님도 믿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종교가 인간의 잘못된 욕심충족의 시녀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신앙고백 전체, 그 첫 문장에서 마지막 아멘까지의 내용 모두를 올바로 이해하고 고백할 때 진실되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올바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복음을 우리의 신조로써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로써 전파해야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한 4,20). 말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선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서간에서 말했듯이 살아있는 신앙은 좋은 일을 탄생시키며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일만으로는 우리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일함으로 정당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경은 윤리계명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믿나이다”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올바르게 알아듣는다면, 고백을 함으로써 믿고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야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