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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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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아버지(patrem omnipoten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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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 7,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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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아버지(patrem omnipotentem)
1. ‘아버지’
각 종교마다 하느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름: 신, 조물주, 옥황상제, 상제(上帝), 천주(天主) 등등.
회교(무슬렘)의 경전인 코란에서는 하느님께 99가지 호칭을 붙임. “하느님! 유일한 신이신 그분, 살아 계신 분,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존재의 파수꾼이시고 보호자 … 가장 높으신 분,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 … 후원자 …”(코란, 2,255-57 참조)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는 사람의 방식대로 받아들여진다.”라는 성 토마스의 말처럼 자신의 하느님 상(像)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서 하느님을 수용함.
잠깐,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확인해 볼 것. (예, 정의의 심판관, 자비로우신 아버지, 천주님, 주님, 등등)
사도신경 첫 마디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느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버지
1) 당신이 먼저 부르시고
먼저, 일찌기 12살이 되던 해에 성전에서 사라졌을 때 찾아 온 마리아와 요셉에게 “제가 아버지의 일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49)하심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심.
다음으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의 아버지이심이 드러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공생활을 하시면서 수시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심.
-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 의지(요한 5,36)와 행동(5,17-20)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실존(요한 10,38)과 사랑과 인식(요한 10,15)을 터전으로 한 친밀한 교류관계가 있음.
-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심: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37).
예수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호칭은 아라메아어인 아빠(Abba)라는 말은 본디 어린이 말입니다. 친밀성, 전적인 의탁이 담겨있는 용어.
2) 부르도록 가르치시고
-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 23,9)
-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하고 부를 것(마태 6,9-11).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시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닮는 자녀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심
아버지의 표상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소개 한 것은 구약성서의 표상(表象)을 수용-발전시킨 것임
- 생명을 주시고 돌보시는 아버지: “너를 만드신 야훼, 너를 모태에 생기게 하시고 너를 도우시는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나의 종 야곱아 내가 뽑아 세운 여수룬아” (이사 44,2)
- 자비가 넘치는 아버지: “광야에서도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았느냐? 너희가 바로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길에서도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제 아이를 업듯이 너희를 업어다 주시지 않았느냐?” (신명 1,31)
- 기우는 자녀를 편애하는 아버지: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야훼는, 묶인 자들을 풀어주신다. 야훼,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야훼, 거꾸러진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야훼,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는 분(시편 146,6-10)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신약 성서에서 아버지의 표상은 더욱 퐁요로워집니다.
첫째, 우리가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하고 걱정하지 말라.…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 6,31-32)
둘째,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는 아버지: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 11,11-13)
셋째, 공평하신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45)
넷째, 우리가 행한 자선을 보고 갚아 주시는 아버지: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18)
다섯째,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어머니 하느님 ?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꼭 어머니와 대칭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부성적이면서, 모성적이십니다. 모성적인 하느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 3가지.
첫째,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라하힘’이라는 단어가 자궁 또는 모태를 뜻하는 ‘레헴’에서 옴.
둘째, 하느님의 애절한 사랑을 젖먹이 어미의 심정에 비유함: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 49,15)
셋째, 아이를 양육하는 어미의 애간장 녹는 모정에 비유함: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호세 11,.3-4.8)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함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2).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특권임.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
육신의 친부모가 결국 양부모라는 사실을 알것/ 부모의 은택을 잊지 말 것(효): 내리사랑/ 자녀로서 절대 신뢰할 것 (‘아빠’)
2. ‘전능하신’
전능
1) 말뜻
- 신경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그리스어 Pantokrator 였음: ‘만유의 주’, ‘모든 것의 지배자’라는 뜻으로 보호하고 다스리고 돌본다라는 의미가 우선적으로 나타남.
- 신경이 라틴어로 작성되면서 omnipotens로 바뀜: 이는 ‘전능의’의 의미를 부각함.
2) 전능자 하느님
구약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표현들
(1) 엘로힘
엘로힘은 흔히 ‘신’을 가리키는 고대 셈어 ‘엘’(EL)의 복수형인데, 엘로힘은 복수의 뜻으로도 쓰이나(출애 12,12;18,11;20,3 참조), ‘우두머리 신’을 가리키는 단수의 의미로 (판관 11,24) 많이 쓰임
-2000번 이상 성서의 엘로힘은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가리키는 복수형 단수 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모세 이전의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창조 이야기 안 에서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통해 능력의 하느님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심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2) 야훼
야훼라는 이름은 모세에게 비로소 계시됨(출애 3,14): “I will be who I will be”(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되는 존재) (自由自在) 흔히 ‘나는 나다’, ‘나는 있는자 그로다’라고 번역하는데 단순히 ‘있다’는 의미를 넘어 ‘힘찬’ 존재, 곧 ‘자신이 살아서 활동함을 아는’ 존재를 뜻함.
- 이 야훼가 바로 해방의 하느님이 되심.
- 이 하느님은 세상을 초월하여 계시면서도 역사의 하느님이며 세상의 하느님이심.
‘전능(全能)’하시다 함은
하느님께만 속하는 속성을 ‘비분여적(非分與的) 속성’, ‘비윤리적(非倫理的) 속성’이라고함.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비분여적 속성들.
1) 영원하심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 1,8)라는 말씀처럼 시작도 끝이 없으신 분이시요, “나는 야훼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말라 3,6)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24,35)하신 말씀처럼 변치않으심을 나타냄.
2) 전지(全知)하심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히브 4,13)하신 말씀처럼 피조물의 속속들이를 아시고,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속한 일까지도 철저히 또 완벽하게 아심. (이사 46,10).
3) 편재성 (遍在性)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가 가까운 곳에만 있고 먼 곳에는 없는 신인 줄 아느냐? 사람이 제 아무리 숨어도 내 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똑똑히 들어라.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예레 23,23-24)
4) 정의로우심
공의(公義 Justitia): “각자에게 줄 것을 주는 것(cuique suum)”. 상선 벌악의 이 분배 정의
외견적인 하느님 무능(無能)
1) 왜?
하느님은 전능하시다고 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아우슈비츠와 같은 악이 가능한가? 하느님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왜 저지하지 않으셨는가? 왜 방관 속에 구경만 하고 계셨는가? 왜 착한 사람들이 무고하게 고통당해야 하는가?
한편,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향해 삿대질을 합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악한 이는 왜 벌을 받지 않는가?
끊임없는 물음들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느님은 그야말로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닐까?
2) 무능의 신비
하느님의 외견상의 무능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0)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음.
-사랑의 절정은 ‘자유의지’를 줌에서 이루어짐: 이는 모험. 거절, 배반을 각오해야함. 그 배반을 감수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무능, 무력하게 보임. 하느님의 연대적 고통이 확인되는 자리.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 구약의 심판 예언 중 많은 것이 엄포성 발언.
3. 전능하신 아버지
사랑의 전능
전능하신 아버지의 전능은 힘의 전능이 아니라 사랑의 전능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힘은 예수의 권위있는 선포,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에게 보이신 힘,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작용하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사랑의 전권에서 드러남.
사랑은 전능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폭군의 힘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고 인간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 힘 앞에서 사람들은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 놓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겐 남을 위해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올가미에 걸리신 하느님
고통 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하지 못합니다.(본 회퍼)
자비를 표현하는 영어의 compass- ion이나 독일어의 Mitleiden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과 고통을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극도의 고통과 무의미한 죽음의 상황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이 사랑은 지상의 모든 권력과 폭력에 대해 엄청나게 무력해 보입니다. 마치 나치시대 한 유다인(동시에 그리스도인) 신앙인인 엘리 위젤이 오늘 고백한 것처럼. “나치 친위대가 유다인 두 명과 한 젊은이를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 매달았다. 두 사람은 즉시 죽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반 시간을 죽음과 싸워야 했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한 사람이 ‘신이 어디 있어? 어디에 신이 있어? 하고 물었다. 오랜 시간 후에도 젊은이가 여전히 올가미에서 괴로와하자 그 사람은 다시 ‘신은 지금 어디 있어?’ 하고 외쳤다. 그러자 나는 내 속에서 한 목소리가 답변하는 것을 들었다. ‘신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 하느님은 저기 저 올가미에 달려 있다.’”(엘리 위젤, 흑야, 가톨릭출판사, 1991)
다시 아버지께로
모든 사람이 부모에 대해서 좋은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부모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대로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행복할 때나 어려움 중에 있을 때, 기쁠 때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을 때 언제든지 ‘어린이’가 되어 달아가서 안길 수 있는 그런 가없는 품이 ‘아버지’ 하느님께 있습니다. 잘나도 못나도 내 삶을 인정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나를 잘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신 아버지(마태 10,30 참조)로서 언제나 나를 돌보시고, 맞아주시고, 기를 살려주심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자녀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고 아버지 앞에 어린 아이입니다. 나는 아빠 없이 나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어른인 줄 압니다. 어른으로 행세합니다. 어른으로 독립하여 사는 것은 너무 힙겹습니다. 험한 세상을 자기 힘으로 산다는 것은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그 아빠는 ‘전능하신’ 아빠이십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사주시고 모든 것을 해주시고 못하는 것이 없는 ‘아빠’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빠는 ‘폭군’이 아니시기 때문에 나보다 힘이 세시면서 나를 작다고 깔보시지도 않고 나한테 져주시기도 하고, 내가 뗑깡을 부리면 쩔쩔매시기도 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시고, 아플 때 밤새우며 곁을 지켜주시고, 내가 곁길로 빠질 때 줄담배를 피우시며 노심초사하시는 그런 ‘아빠’이십니다. 호세야서 말씀처럼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호세 11,8-9)하며 애간장을 끌이시는 분. 때로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외로워서 사랑을 호소하시는 분. “아!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 6,4-6)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집을 나와서는 이내 탕진해 버리고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간 탕자처럼 우리도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출 뿐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신다 했습니다. 이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을 이내 기쁨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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